축제와 거리풍경

"바다를 달리는 자동차 "

아이비의 알래스카이야기 2014. 3. 24. 05:11

007 영화에서나 볼수 있었던 수륙양용차들이 지금은 여기저기서

선을 보이고 있네요.

처음 수륙양용차가 어떻게 생겨나고 발전 했는지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도록 해 보겠습니다.

어릴때 늘 타보고 싶었던 꿈의 차 , 바다와육지를 거침없이 달리는

수륙양용차를 한번 타러가 보실까요!

 


 



짠! 이게 바로 1704년도 네브라스카에 살던이가 만든 " 마틴에어카 " 랍니다.

보기에는 형편없어 보이지만, 그당시 아주 획기적인 발명품중 하나 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개인적으로 만들던 사람이 아직도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고 하네요.


 

 

 


정식으로 차량증명서도 발행이 되었으니, 이게 최초라고 보시면 될겁니다.

물론, 미국에서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상력이 실제 발전되어 지금의 수륙양용차와 버스가 개발이 된게 아닌가 합니다.

현재 관광지에서는 도시와 강을 다니는 버스투어가 유명하긴 합니다. 


 

 

 


설계도를 보니 왠지 엉성해 보이긴 합니다.하지만,

아무도 생각해 내지 못했던 이런차를 개발 한다는건 남다른 상상력과 도전정신이 있어야겠지요.

 

 

 


처음 독일의 폭스바겐이 2차대전때 제작되었던 지프 형식의 "슈빔바겐" 이라는 수륙양용차량이

있었습니다. 4인승으로 기관총 거치대까지 설치된 전투형 차량이 선을 보이면서

각종 활약을 했습니다.

물론, 우리나 해병대에도 수륙양용장갑차량이 있지만 , 아주 나중에 도입이 되었지요.

그 장갑차 가격이 40억 정도 되었는데, 지금은 많이 싸졌을거라 생각이 됩니다.


 

 


1949년 드디어 일반 승용차를 보완해 만든 자동차가 탄생을 했습니다.

원래 전투를 치르기 위해서 발명이 되었던 수륙양용차들이 제정신(?)을 차리고

일반 차량으로 발전을 하게 된거지요.

 

 

 


007영화에서나 볼수 있었던 바로 그런 차량 입니다.

제임스본드가 탔던 차량이 언젠가 60만달러에 팔렸다는 이야기를 들은적 있는데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최초의 수륙양용 자동차로 불리는 `슈빔바겐(Schwimmwagen)`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재자였던 히틀러의 지시 아래 폭스바겐을 설계·제작한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와

수륙양용차 전문 설계자였던 '한스 트리플'에 의해 개발되었으니, 수륙양용차에 대해서는

독일과 폭스바겐이 최 선두주자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차량 밑에 보면 이렇게 스쿠류가 달려 있습니다.

참 신기하죠?

 

 


엔진이 차량 뒷부분에 있는건 아마도 배의 무게가 뒤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앞부분이 가벼워야 차량이 물위를 달릴수 있으니 말입니다.

 

 

 


독일의 히틀러에 의해 만들어졌던 'swimming car(수륙양용차)'라는 의미를 지닌 '슈빔바겐'은

북유럽의 다양한 지형을 이용해 보다 효과적으로 적을 공격하고자 만들어진 차량이었는데,

다른 상대국에서는 부러움과 질시의 눈초리로 쳐다만 볼수밖에 없었답니다.


 

 

 


이렇게 차안에는 수상안전장비인 수상조끼가 늘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안전띠가 아니라 안전조끼 착용이 의무겠죠.

 

 

 


운전석인데, 왼쪽에 여러가지 보조스위치들이 수중에서 작동을 하는 장치로 보입니다.


독일에서 생산 되었던

슈빔바겐은 전쟁기간 동안 총 14,283대가 생산되어 정찰, 수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으며,

전차 시동용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지프(Jeep)와 함께 가장 큰 활약을 펼쳤던 슈빔바겐은

독일의 대표적인 군용차량으로, 전쟁이 끝나자 일부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는 레저용 차량으로도

사용되었답니다.



 


수륙양용차나 이런 RV 차량의 선두주자를 달렸던 독일의 폭스바겐 매력은 참 넘치고도 넘치지

않나 싶습니다.

 

  


폭스바겐의 역사를 잠시 되돌아 보자면,

폭스바겐이 히틀러의 ‘독일 국민에게 저렴한 가격의 실용적인 소형차를 공급한다’는 공약에 따라

엔지니어링의 천재 페르디난드 포르쉐 박사에 의해 완성된 것은 틀림없지만, 실제로

독일 국민에게 공급될 때 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렸는데,

전쟁에 의해 공장의 75%가 폭격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입이다.

비록 영국군 관할로 되어있지만 공장은 엄연히 (당시) 서독의 자산임은 틀림없었고

 언제까지나 영국군이 경영할 수도 없는 형편이라 적절한 독일인을 찾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등장한 사람이 나중에 시대의 명 경영자로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하인츠 노르트호프 박사랍니다.


 


1948년 노르트호프 박사가 사장으로 취임하자마자 판매촉진을 위한 개선작업이 시작되었는데,

엔진이나 구동계는 그대로지만 수출을 염두한 티프 11a가 1949년 3월에 등장했으며,

유리창틀, 휠 캡, 범퍼, 도어 핸들, 헤드램프 가장자리 등에 크롬을 사용했고

내장의 재질과 마무리를 모두 높였고, 그럼에도 가격은 불과 325마르크 높은 5625마르크였고,

4개월 후에는 스텐더드 모델은 4800마르크, 티프11a는 5450마르크로 낮췄는데,

폭스바겐의 대 약진은 이 가격인하정책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랍니다.


이번에 출시되는 삼성갤럭시 5s도 가격인하정책으로 80만원으로 잠정

책정이 되었다고 하네요.

향후 귀추가 주목되는 부분입니다.




 


폭스바겐에서 생산된. 티프 11a도 핸들을 베이지 색 2스포크로 바꿔 계기 시인성을 좋게했고

좌석 이동 및 고정장치도 현대식으로 바뀌었습니다.


1950년 1월에는 서스팬션 토션바의 구조를 개선했고 5월에는 유압식 브레이크가

적용되었으며, (이전은 기게식이었다.) 또한 캔버스톱도 250마르크의 옵션으로 달리기 시작했고,

이런식으로 지속적인 개선이 되면서도 가격은 점점 낮아져

 1951년 9월 스텐더드는 4600마르크, 티프11a는 5400마르크가 되었습니다.




 


1952년 10월에는 저단 기어 외에는 전부 싱크로나이저가 부착되었고,

기화기도 종전 솔렉스 26VFJ/VFJS에서 28PCI로 바뀌며 가속성능이 향상되었답니다.


동시에 휠도 인치업하고 토션바도 종래 5장 판스프링에서 6장 판스프링으로 바뀌어 조종

안정성을 향상시켰는데, 이 때는 최고속도 105km/h로 아우토반을 내달리는 때라 당연한 대책이었고,

 이 때부터 깜박이 스위치도 핸들 아래쪽으로 가져왔고 (이전에는 스위치 방식)

주행중 와이퍼를 끄면 제자리로 돌아오는 장치를 다는 등 고속화에 따른

전면적인 수정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이다.


그래도 남자분들은 차량에 대해 어느정도 아시니 약간은 이해가 되시겠지만,

여성분들은 모두 처음 듣는 단어일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ㅎㅎㅎ




 



폭스바겐을 한마디로 정의를 내리자면, 노력과 집념의 결과라고 할수밖에 없었답니다.

노력과 집념 앞에서는 어떤 난관도 모두 헤쳐나갈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비해 요새 저를 보면 자생 능력이 점점 떨어지는것 같아 암울 하기만 하답니다 ㅜ.ㅜ.


 

 

 


이에반해 다른 경쟁사와 비교를 해 본다면,

폭스바겐은 최고속도 105km/h, 0-100km/h 가속에 50초인데 비해 1950년 8월 모델을 변경한

오펠 올림피아는 OHV 1588cc 37마력 엔진(이후 39마력으로 향상)으로

최고속도 112km/h, 0-100km/h 가속에 43초의 성능에 4단 싱크로 변속기가 장착되어

있었습니다.



포드 타우누스는 1952년 12M으로 발전하여 1172cc 38마력 엔진으로

최고속도 112km/h, 0-100km/h 가속에 38초에 팬더가 튀어나오지 않은 최신식 차체를

얹었습니다.



 

 

 

 

 


따라서 폭스바겐의 VW1200 시리즈가 1945년부터 1965년까지 20년간 스텐더드 모델이 54만4344대,

11a가 671만 4830대라는 엄청난 생산실적을 올린 것은 뛰어난 신뢰성과

저렴한 가격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노르트호프 박사가 미국에서 배워온

대량생산방식의 덕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노르트호프 박사는 라인업을 늘릴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포르쉐 박사가 시제차를 만들 때부터 세단형 뿐만 아니라 오픈형도 고려되고 있었고,

독일에는 롯시, 바인베르크, 안비 등 유명한 차체제조회사들도 있었습니다.

최초의 개조모델은 로메체로 단넨하우어가 1946년 4도어 형 세단과 2도어 형

카브리올레를 제작해서 700여대를 판매했으며, 이후 다양한 제작자들이 다양한 차를 만들었지만

그 중 가장 유명하고 가장 많이 팔린 모델은 카르만 사의 작품이었습니다.


최초로 나온 차는 4인승 카브리올레로 1949년 3월 7500마르크로 판매되었는데,

스텐더드의 샤시와 엔진을 사용하고 차체 하단부도 동일했지만 인테리어와 도장을 고급화하였고,

이후 1955년 이탈리아의 ‘기아(Ghia)’ 디자인에 의해 탄생한 그 유명한 ‘카르만 기아’ 쿠페와

카브리올레가 탄생했습니다.(한국의 기아가 이 이름을 도용한것 같은 예감이..)


 쿠페는 7500마르크, 카브리올레는 8250마르크로 당시

 벤츠 170V의 가격 7800마르크를 생각하면 상당히 고가격이지만 잘 팔렸습니다.




 


판매대수를 종합해보면, 1945년 1293대, 1946년에 9931대, 1947년 8940대,

1948년에 19,127대로 이후 49년 4만6647대, 50년 8만3540대, 51년 9만6644대,

 52년 12만8023대 등 생산대수가 급증하게 됩니다.

53년에는 29만6489대를 판매 처음으로 오펠을 넘어섰고 이후로 오펠은 몇 번을 제외하고는

폭스바겐에게 계속 눌리게 된답니다.

 




볼프스부르크도 전쟁 전에는 하나의 시골마을에 불과했지만 폭스바겐의 성공 때문에 크게 발전했는데,

노르트호프 박사는 공장설비 외에도 지역 발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학교, 교회 등의 시설 등의 설립 뿐만 아니라 전기, 수도 등을 도시 주민을 위해서 공장에서 공급했으며,

또한 1952년 1월 30일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가 사망하자마자

볼프스부르크에서 가장 큰 거리를 포르쉐 로(路)로 개칭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런점이 참 마음에 듭니다.

지방자치가 시작되면서 , 각 지방에 있는 도시가 같이 발전을 하려면 이러한

기업들의 노력이 꼭 필수여야 합니다.


일본의 어느 한 온천 지역을 가보니,

동네주민들의 투자로 모든 관광지가 자치정부의 이점을 살려 주민 소유가 되어 있는걸 보았습니다.

모든 혜택이 주민에게 다시 돌아가는 순환역활을 하는게 바로 지방자치제도의 특색인데,

우리나라 제주도와는 아주 상반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제주도를 보면, 볼때마다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데

토지의 대부분이 외지소유 이거나 외국인들이 속속 사들이고 있는 실정 이랍니다.

주민에 의해 발전하는 그런 제도가 주어졌지만,

실상이 그러하지 않으니 안타까울수밖에 없답니다.


제주도에서 벌어들이는 모든 세수입은 대도시가 있는

서울의 법인 소재지에서 모두 납부를 하게 되는데

이러다보니, 정작 제주도에서 차지하는 세수입은 적어질수 밖에

없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는 세법 또한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자신이 있는곳, 자신이 태어난곳,
스스로를 기억하는게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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