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자전거를 탔으니 오늘은 자전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나가볼까 합니다.
어릴때부터 세발 자전거부터 시작해서, 어른이 되어서는 짐을 가득 싣는
자전거나 신사용 자전거 혹은, 산악용 자전거를 누구나 한번쯤은
타보지 않을까 합니다.
집집마다 자전거 한대쯤은 모두 갖추고, 자전거로 통학도 하고
동네 마실도 다니고 , 장도 보러 다녔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돋아 납니다.
자 ! 그럼 자전거 발전사를 한눈에 볼수있는 곳으로 가 볼까요!
우리나라는
1944년 기아자동차와 삼천리자전거의 전신인 경성정공이 일본에서 귀국한
故 학산 김철호 회장에 의해 설립되었고
1952년도에 자전거를 생산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바퀴를 나무로 만들다보니, 충격을 완화 시키질못해 엄청 애플이 아팠을것 같지만,
그래도 저 자전거를 끌고 나가면 모두들 신기해 하면서 엄청 부러움을 샀을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1817년 바로 이런 자전거가 탄생을 했습니다.
거의 뼈대만 갖춘 자전거 였지만 그당시 아주 획기적이었을거라 생각이 됩니다.
우라나라의 자전거 하면 삼천리를 빼놓을수 없죠.
넘어지지 않게 뒷바퀴는 두개가 달려서 중심을 잡을수 있게 고려를 한것 같습니다.
삼천리 자전거는 1987년 국내 최초로 년간 생산대수 100만대를 돌파 했으나.높은 인건비와 물가로 인해
자연히 중국으로 생산 시설이 이전되었으며, 지금은 부품을 들여와 조립을 하는 수준으로 전락을 했으니,
참 안타까운 현실 입니다.
1870년대에 들어서는 모두 쇠로된 자전거가 양산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기사 지금 중국을 보면 시골에서 대나무로 자전거를 만들어서 타는걸 본적이 있습니다.
대단하더군요.
1890년대에 들어서는 갖가지 변형을 주어 자전거를 만들기 시작 했습니다.
지난번 전문자전거 샵을 갔더니 , 자전거 한대가격이 웬만한 승용차 한대값과
비슷하더군요. 아주 놀랐답니다.
1900년대에 들어서자 이렇게 바퀴살도 제 모양을 갖추고, 패달도 제 형태를 찾기에 이르릅니다.
바퀴는 문자와 함께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으로 꼽히게 되는데,
바퀴는 마차, 자전거, 기차, 기계 등을 만드는 데 가장 기초가 되며,
대지에 발을 딛고 살아온 인류는 항상 빠르게 그리고 좀 더 멀리 이동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퀴는 이런 꿈을 실현해 주는 중요한 도구가 됐는데, 바퀴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기원전 4500년 수메르 지역에서였습니다.
산업 혁명기에 수많은 혁신적인 발명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에 자극을 받은 마차제조업자,
대장장이, 발명가들은 새로운 교통수단을 만들어내고자 고심했는데,
그들이 목표로 하는 것은 말의 힘이 아닌 사람의 힘으로 가는 마차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만들어낸 것은 대부분 크고 무거운 것이었답니다.
이런 기계들은 빨리 가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별로 실용성이 없어서,
발명가들은 딜레마에 빠졌는데, 마차 같은 커다란 기구에 증기기관을 달아서
힘을 크게 하는 방법을 선택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기구의 크기와 무게를 줄여서 마치 말처럼 개인용 탈것을 만들려고 시도했답니다.
마침내 가장 간단한 방식에서 해결책이 제시됐는데,
마치 아이들이 말처럼 타고 놀던 장난감 목마 같이 아주 간단한 구조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지 2년 후인 1791년 프랑스의 귀족
콩트 메데 드 시브락 Conte Mede de Sivrac이
두 개의 바퀴가 달린 목마를 타고 파리의 팔레 루아얄 Palais-Royal 정원에 나타났습니다.
이 목마는 나무 바퀴를 목재로 연결하고 그 위에 올라타서 발로 땅을 번갈아 밀고
앞으로 나가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등장은 극적이었는데, 이 새로운 탈것은 대단한 소동을 일으켰으며,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 신기한 기계를 보고 놀라워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 새로운 탈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것이 역사상 가장 먼저 등장한 자전거 라고 할수 있습니다.
시브락의 기계에는 셀레리페르 Célérifère 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이것은 ‘빨리 달리는 기계’라는 뜻이었으며,
다른 이름으로는 슈발 드 보아Cheval de Bois (목마)’라고도 불렸습니다.
셀레리페르는 말, 사자, 인어 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외형이 아주 아름다웠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앞바퀴로는 방향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시브락이 셀레리페르를 타고 언덕을 내려오다가 나무나 집을 만났을 때는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셀레리페르는 사실 실용적인 탈것이라기보다는 당시의 귀족이나 젊은이들의 오락기구에 더
가까웠습니다.
셀레리페르는 시브락이 타고 나타나기 이전부터 어린이들의 장난감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큰데,
오늘날에도 아이들은 이런 장난감 목마를 타고 놉니다.
시브락은 어린이들의 장난감 목마를 개조해서 타기 시작했고
이것이 어른 귀족들의 오락기구로 발전한 것으로 생각 됩니다.
이 목마는 파리의 멋쟁이 남성들 사이에서 오락기구로 큰 인기를 끌었는데,
팔레 루아얄 정원에는 젊은이들이 당시 유행하는 복장으로 이 벨로시페르를
타느라고 북적거렸다고 합니다.
이 새로운 놀이는 아주 유명해져서 셀레리페르를 타는 사람들이 클럽을 만들고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에서 경기를 하기도 했으며,
그 후 19세기가 되면서 프랑스 젊은이들이 신나게 탔던 이 새로운 장난감이
어떻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그 다음 얘기가 없습니다.
자전거 역사는 19세기 초반 독일의 한 귀족의 이야기에서 다시 시작 됩니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어땠을까요?
우리나라에서 자전거 대회가 처음 열린 것은 1906년 4월인데
1906년 4월 신문에는 두 차례 자전거 대회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열린 자전거 대회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며,
4월 7일 대한매일신보에 자전거 대회가 열린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1907년 5월 2일 서울 삼선평에서 내외국인 모두가 참여한 자전거 운동회가 개최 되었으며,
1907년 6월 20일에는 서울에 있던 한일자전거 상회 주최로 훈련원에서
동서양의 외국인들이 참가한 가운데 대회가 열렸고 1908년 7월 12일에도 한일자전거 대회가 열렸고,
그 후 자전거 대회는 아주 활발하게 개최됐습니다.
처음에는 자전거 상점들이 자전거를 홍보하기 위해
대회를 개최했는데,
당시 자전거 선수들은 대부분 자전거 상점의 점원들이었습니다.
그후 자전거 대회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신문사에서도 대회를 개최했습니다.
1913년 4월 10일자 매일신보는 인천, 서울 용산 , 부산, 평양 등 네 곳에서 경성일보와
매일신보가 공동주최한 전조선 자전거 경기대회가 열릴 예정이라고 보도했는데,
4월 13일 서울 용산에서 열린 대회는 일본에서도 일류 선수들이 참가했으며,
대회 날에는 수십 대의 전차가 특별 운행하고 대회장에는 10만 명 이상의 관중이
모일 정도로 성황을 이뤘습니다.
이날 한국인 엄복동와 황수복 선수가 일본 선수 4명과 겨뤄 엄복동 선수가 1등을 차지하고
황수복 선수가 3위를 했고,
평양 경기에서도 엄복동 선수가 우승했습니다.
이 때부터 엄복동 선수는 조선의 자전거 영웅으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아스라히 기억이 나네요.(구전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자전거의 아버지
칼 폰 드라이스 남작Baron Karl von Drais은 나중에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된
바덴 대공국의 산림감독 책임자였는데, 그는 카를스루에의 명문가 출신으로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임학과 수학, 물리학을 공부했는데 그가 맡은 일은 그의 성향과도 잘 맞았으며,
그는 엔지니어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임무는 광활한 숲과 거친 땅을 감독하는 것이었는데,
이 중에는 가파른 언덕도 있었습니다.
그는 이 넓은 지역을 터벅거리며 힘들게 걸어다녀야 했습니다.
이것은 그를 지치게 했으며, 그가 새로운 탈것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된 것도 힘든 산림시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만들어낸 이 기계의 가장 획기적인 것은 바로 조정이 가능한 앞바퀴였는데,
이것이 없었다면 어떻게 하면,길고 복잡한 숲길을 지나갈 수 있을까 궁리를 하던중,
그는 이 기계를 더 개선했으며 이것은 1817년 8월 1일 <카를스루에 차이퉁Karlsruhe Zeitung>에
처음 소개됐습니다.
이 신문은 우편마차로 네 시간 걸리는 거리를 드라이스가 자전거를 타고
한 시간 만에 간 것에 대해 보도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엄복동 선수가 일본인과 대결에서 연전연승하면서
항일정신과 민족의 자존심을 고취시켰고 엄복동 선수의 활약에 힘입어 자전거 경기는
가장 인기 있는 종목으로 떠올랐는데,
해마다 봄가을이면 서울의 장충단 공원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자전거 대회가 열렸는데
이같은 자전거의 인기는 1940년대까지 계속됐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노래도 있었던것 같습니다.
표주박
중학생때였는데, 집에 짐 자전거가 있었습니다.
뒤안장에는 짐을 실을수 있도록 큰 짐안장이 있고, 사람이 앉는 안장 뒤에는 쇠파이프를
높게 용접을 해서 짐을 높이 쌓고 , 달릴수 있는 정말 대형 자전거 였습니다.
그당시에는 정말 엄청 크게 느껴지더군요.(일명 쌀집 자전거.기억하시나요?)
패달에 발도 안닫는데도 불구하고 , 낑낑 거리고 타고 나갔다가 얼마나 넘어졌는지 모른답니다.
어른이 되면 자동으로 자전거를 모두 탈수 있는데, 유독 여성분들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어른이 되서도 타지 못하는 경우가 아주 많더군요.
남자들은 어른이 되면 다 탈줄 압니다.
뒤에 연인을 태우고, 바람에 스카프를 날리며 신나게 논둑을 달리는 그 기분은
정말 이루 말할수 없이 상쾌하고 날아갈듯 즐겁답니다.
안해 보신분들은 모두 한번 해 보세요.
그 기분 정말 끝내 준답니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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